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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등록일 2017.11.14 06:13
글쓴이 박복진 조회 1599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11월의 중순, 오늘은 일요일. 아직은 춥지 않은 날씨가 날 기쁘게 한다. 아침에 보니 데크가 조금 하얗게, 죽어가는 장면의 삼류 연극배우가 한 서툰 감정처리 입술 분장처럼 옅게 한거풀 서리가 내렸지만, 동쪽의 작은 동산을 넘어 해가 올라오자 언제냐는 듯이 녹아 없어져버렸다. 밉고 싫은 것들이 이렇듯 자진해서 사라지는 것은 날 기쁘게 한다. 며칠 전에 시골 겨우살이 준비의 가장 큰일인 김장도 끝내놨고, 어제는 그동안 못했던 길오달, 길게 오래 달리기로 4시간 여 장흥리, 주록리 쪽으로 장거리 달리기 훈련까지 해놨으니 오늘은 하고 싶은 딴짓을 해도 되는 여유가 날 기쁘게 한다.

 

무얼 할까? 라고 생각하며 장독대 항아리에 담아놓은 개 사료를 한 사발, 두 사발 담아서 개집으로 다가가 파비에게 조반을 차려준다. 말 못하는 짐승인 개가 저렇듯 열심히 제 꼬리를 좌우 흔들며 나를 반기니 이것은 나를 기쁘게 한다. 오냐, 오늘 너도 많이 먹고 주말을 즐기거라! 이제는 제 차례라고 어느 구석에서 달려 나온 우리 집 고양이 케티가 내 다리 주위를 맴돌며 자기 밥을 달라고 하니 이 녀석에게도 사료를 퍼와 그릇에 떨어진 빨간 단풍잎을 건져내 치우고 담아 주니 야옹! 아옹. 이 녀석의 감사 인사 또한 날 기쁘게 한다.

 

이제 오늘 무엇을 할 건지 마음을 잡았다. 미루고 미루었던 일을 시작하겠다. 할 일이 정해지자 이 결심이 날 기쁘게 한다. 손녀를 위해 컨테이너에 내가 직접 페인트 붓으로 그린 타요 버스 창고로 간다. 버스의 앞 유리창과 창문 닦기와 후사경을 나타내는 앙증맞은 그림들이 날 기쁘게 한다. 타요버스 컨테이너 창고 안에는 내가 오늘 할 일을 가능하게 해 줄 온갖 잡동사니 공구가 다 있어 이 또한 나를 기쁘게 한다.

 

목수용 작업 허리띠를 찾아 꿰차고, 호주의 멜버른에 갔을 때 산 카우보이 가죽 모자를 쓰고 망치, , 전동 드릴 등 목공 공구 그리고 여럿 크기의 못들이 들어있는 못통을 챙겨들고 나와 데크에 이것들을 펼친다.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아놓았던 자투리 나무, 각목들도 비닐하우스 안에서 들고 나와 작업 시작을 마무리하니 이 또한 날 기쁘게 한다.

 

내가 일을 시작하려는 싯점에 맞춰 아침나절의 해도 제법 올라와 내 어깨에 한 팔을 얹혔다. 몇 개 안남은 애기단풍나무 잎은 자기 몸으로 그늘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거둬갔다. 그렇단다. 난 너의 여름날 그늘보다는 지금은 따뜻한 햇살이 필요하단다. 자진해서 알아 그늘을 거둬간 애기 단풍나무의 현명함이 날 기쁘게 한다.

줄자를 집어 들고 종이에 미리 적어놓은 숫자들을 확인한다. 귀 뒤에 꽂은 목수연필을 잡아 나무에 금긋기를 한다. 그걸 데크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치고 톱질을 한다. 들고 가서 다시 재보고 또 톱질을 한다. 이 크기로 여러 개 잘라 목수 연필로 그 위에 조립위치를 적어놓는다. 1, 2, 중간1, 중간2, 발판 아래1, 발판 옆1.. 나는 지금 다용도실의 잡동사니를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는 나의 작품, 다단계 시렁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양평읍에 나가 철재 앵글을 덜렁 사다놓는 대신 내가 직접 자투리 나무로 만들어보는 중이다. 이런 행동이, 나로서는 대단한 집중을 요하는 이런 얼치기 목공일이 날 기쁘게 한다. 오늘 나는 목공 창작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줄자로 재고, 연필로 금을 긋고, 톱으로 자르고, 후이이잉! 전동 드릴로 구멍을 뚫어 못을 때려 박고, 이걸 들고 가서 안에 다른 곳에 걸그적거림이 없는 지 확인하고, 다시 들고 나와 2단 조립으로 속행. 이런 단순하고 어설픈 일감에 대한 몰입이 나를 기쁘게 한다. 왼공일 휴무일에 갖는 이런 완전 자유가 날 기쁘게 한다.

 

일의 진척에 따른 촉촉한 만족감이 나를 적셔올 때 해는 벌써 정남으로 와 있었다. 데크의 기둥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현관문에 직각으로 꺾이어 걸쳐져있다. 이때 오늘 김장하는 뒷집에서 날 불러주는 소리. 김장을 다 끝내고 겉절이에 수육 그리고 막걸리가 준비되었으니 얼른 건너오라는 이웃의 반가운 소리. 우리 집 하얀 대문을 넘어 엄청 빨갛게 물든 화살나무 잎사귀 사이 뚫고 내 귀에 들어오는, 밥때를 용케 맞춘 이웃의 이 초대가 또한 나를 엄청 기쁘게 한다. 만추의 한가운데에서 오늘도 이렇듯 살아 움직이고 있는 나를 느끼고 있는 내가 나를 엄청 기쁘게 한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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