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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의 눈물 등록일 2022.10.13 09:22
글쓴이 박복진 조회 264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의 눈물                                                                                  2022. 10. 12

 

  나는 그 부인을 다섯 번 만났다. 매해 한 번씩 햇수로는 7년째지만 코로나로 인해 두 번을 걸러 딱 다섯 번을 만났다. 만난 곳은 언제나 지은 지가 200년이 넘는 핀란드 현지, 시골 그 부인의 자택이었다. 그 고풍스런 저택은 원래 어느 장군이 지어서 살았는데 이분들 고조할아버지가 매입해서 지금의 대로 넘어온 집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방안에 환기 시설이 없어 실내에서 난방용으로 땠던 나무 땔감의 그을음이 대들보에 시커먼 자국을 남겨놓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강원도 시골집 나무판자 굴뚝처럼 아주 시커먼 거실 대들보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분들은 이걸 자랑스럽게 여겨 그 위에 하얀색이나 갈색 등 흔히 생각나는 색으로 덧칠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멋있어 보였고 그런 멋을 아는 이 부인네와 바깥양반이 한층 우러러 보였다.

 

  이 저택에 살고있는 부인과 나와의 첫 번째 인연은,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 대회를 창설 하기 위해 핀란드 현지를 사전 답사할 때 이루어졌다. 나는 대회 코스에 위치한 이 집을 처음 방문하였고, 보자마자 이 집에 반했다. 그래서 내년부터 대한민국 울트라 마라톤 전사들이 핀란드에 오면 그들이 이 저택을 방문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이 저택은 이제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의 정식 방문 코스가 되었다.

 

  내가 맨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부인은 이곳 사람들이 특별 행사때 만 입는다는 전통 의상을 입고 이방인인 나를 맞아 주었다. 입고 있는 빨간 벽돌색 긴치마에는 피아노의 검정색 건반같은 연속무늬 줄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앉았다. 저고리는 깃이 매우 넓은 순백색이었고, 그 가장자리는 아주 예쁜 두 가지 풀색 무늬의 전통 자수가 있었다. 그 위에 가슴 쪽 앞이 깊게 파진, 진한 검정 더거리를 입고 있었는데, 저고리와 더거리 사이의 비교적 여유 있는 가슴 공간에는 이 고장 전통 문양의 커다란 금색 브로치 장신구가 꽂혀 있었다. 치마의 말기 아래로는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진한 검정 구두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부인의 전통 복장은 하양, 진빨강, 검정, 이 세 가지 단순 조합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격조가 풍기어 누구라도 당장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도록 아주 예뻤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갖춰서 입은 옷매무새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정장, 아무에게나 보이려고 입는 게 아니랍니다. 아시아의 동쪽 끝 대한민국에서 오셨다면서요?

 

  나를 만날 때 이 부인은 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현관 입구 목재 세 계단 중 맨 아래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과 처음으로 마주친 그 순간에 이 부인은 자기 머리 위에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졌다. 전형적인 북유럽 여인들처럼 하얀 피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고개를 내리면 마치 그 미소가 흘러내릴까 봐 나의 첫 대면 인사 내내 턱을 약간 들고 있었다. 위치가 맨 아래 계단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따스함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금년 8월 오늘. 나와 이 부인은 첫날 대면 인사 때처럼 둘 다 똑같이 그곳 그 자리에 섰다. 부인은 세 번째 목재 계단 중 맨 아래 계단에 서 있었고 복장도 7년 전 바로 그 복장, 화려한 핀란드 전통 복장이었다. 나와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때처럼 손을 들어 머리칼을 만졌다. 황금색이었던 머리칼이 세월과 함께 자연스럽게 변한 연한 금수저 색 머리칼을 그때와 똑같이 위로 쓰다듬었다. 오늘도 손가락에는 그 금색 손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맨 초음 그때와 다른 것은 딱 하나, 그때는 내 뒤에 사람이 없었으나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같이 온, 62022년도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 참가자 34분들이 서 있었다. 모두가 눈앞의 동, 서양 양인이 연출하는, 아무도 짐작을 못한 장면의 펼쳐짐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여왕을 알현하는 귀족처럼 세련된 정중함을 담아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반가운 해후 악수를 나눈 뒤에 한국에서 가져온 널따란 골판지 꾸러미를 내밀었다. 두 겹, 세 겹 싸서 기내 휴대품으로 애지중지 들고 온 것이었다. 극적 효과를 노리고, 일행들 그 누구도 사전에 알아채지 못하게 숨겨서 가져운 선물이었다. 부인의 눈은 호기심, 고마움, 놀람, 여러 사람 들 앞에서의 수줍움 등 준비되지 못한 감정으로 약간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사볼라흐티 부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내 비장의 선물은 지난달 인사동에서 사온 캔바스에 내가 직접 그린 수채화였다. 붓을 잡은 지 이제 겨우 반 년 밖에 안되었지만 겁없이 시도한 나의 작품은 그 부인의 저택이었다. 우리가 맨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해마다 그곳 그 자리에서 그동안 안녕하셨느냐고 반갑게 손을 잡은 곳, 입구에서부터 길게 자작나무가 도열해있고, 핀란드 전통 붉은색 벽과 하얀색 창틀이 인상적인, 우리 둘이 처음 만난 곳, 이 집 저택 현관의 세 단계 목재 계단을 중앙으로 한 그림이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포장이 벗겨지고 안의 내용물이 펼쳐질 때 그 부인의 눈에 감동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묘사가 어려운 여러 가지 감정으로 볼과 목 주위가 빨개지기 시작했음을 보았다. 뒤에 서 있었던 34명 울트라 전사들 속에서 아! 라는 복수의 감탄 신음소리도 들려왔다. 부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에 감사하다는 인사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여태껏 방문 때마다 가져다드린 그 어떤 공산품보다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포장되었던 그 어떤 꾸러미보다도 이렇듯 투박한 골판지 속에 담긴 오늘의 내 선물에 값을 더 매겨 주길 바랐는데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제 수채화 붓을 잡은 지 여섯 달 남짓 형편없는 그 실력으로 겁 없이 달려들어 그야말로 나의 혼을 담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는 유일무이 나의 수채화 작품, 자신이 살고 있는 여기 바로 자기 집 그림에 부인은 감격스런 눈물로 화답해 주었다. 나도 스스로의 벅찬 감동으로 몸이 데워졌다. 나중에 들었지만, 이 광경을 바라보던 상당수 울트라 전사들도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부인은 그림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고, 또다시 눈을 그림으로 가져가길 반복했다. 부인의 핀란드 호수같은 파란 눈이 적셔져 갔다. 이때, 바로 내 뒤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나, 그림으로 사람을 울리게 만드네요. 고흐가 그림으로 누굴 울렸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지금 시방 고흐의 반 토막, 반 고흐도 아니면서 그림으로 부인을 울게 만드네요, 그것도 푸른 눈의 예쁜 핀란드 부인을요, !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울트라 마라톤 그랜드 슬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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